클래식 음악의 불모지라 해도 다름이 없었던 광주에서 최근 클래식 바람이 서서히 불고 있다. 2,3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이 미풍은 해를 거듭할수록 ‘바람의 세기’가 느껴질 정도다.

그 중심에 몇 사람이 있다. 30년 가까이 ‘베토벤 음악 감상실’을 지켜가는 사람들, 그리고 문화신포니에타를 만들어 이끌어가는 정병열씨, 혼자 힘으로 광주국제음악제를 개최하고 있는 백홍승씨, 그리고 이들의 활동에 힘을 불어넣어준 광주시향의 구자범 지휘자 등이다. 이들 이외에도 모나무르 실내악단을 이끈 사람, 오페라 운동을 펴온 사람의 수고도 잊을 수는 없다.

오늘은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광주국제음악제를 개최하는 플루티스트 겸 문화기획자 백홍승씨(43)를 만났다. 그는 광주에서 문화기획자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한국인으로서 도쿄 프라임심포니오케스트라의 예술 총감독을 맡고 있는 실력자다. 그래서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그는 오는 4월 11일부터 3일간 또다시 광주에 ‘클래식의 바람’을 불어 젖힌다. 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일본 교토 필하모닉 챔버오케스트라와 우미부에 플루트 오케스트라, 플루티스트 필립 피에를로(프랑스)와 상퀸 첸(중국)을 광주문예회관 무대에서 선보인다.

이른바 제 2회 광주국제음악제의 A부터 Z까지 도맡아 하고 있는 이가 백홍승씨 이다. 백씨는 이번 행사의 공연예산, 공연시기와 출연자, 출연료 협상, 티켓 가격 결정, 홍보 및 광고, 공연 당일의 진행까지가 그의 몫이다. 그는 요즘 해외 출연진들과 스케줄을 조율하느라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이다. 특히 일본의 교향악단은 동구권의 교향악단들보다 더 꼼꼼하고 요구조건도 많아 작업이 만만치 않다.

백씨가 공연기획자로 나선 것은 출발부터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돈을 벌기 위해 회사를 설립한 공연기획사들과는 궤가 다르다.
그는 어려서부터 클래식 음악 속에서 살아온 음악가다. 작은 아버지는 백영수씨는 성악가였고 아버지는 오디오 마니아였다. 그러다보니 집안은 자연스럽게 클래식에 물들어 있었다. 광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부터 합주부 활동을 했고 중학교 때는 음악제나 콩쿠르에 참가하며 눈높이를 높였다. 고등학교 때 ‘플루트’에 매료되어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학과로 진학했다. 이후 폴란드 쇼팽 음악원에 유학했고 귀국 후에도 외국의 여름음악캠프나 마스터클래스에 참여하며 자신의 음악적 기량을 성장시켰다.

폴란드 쇼팽음악원 유학

그가 일본의 음악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1년 시작한 일본의 ‘가루이자와 여름캠프’에 5년간 쉬지 않고 참가하면서 부터다. 대부분의 마스터 클래스는 유명한 음악가들이 교습을 맡아 음악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5년 동안 꾸준히 참가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일본의 클래식 음악의 질적 수준을 느끼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일본음악계와 쉽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일본어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일본에 거주했던 고모님이 보내주신 일본 동화책이나 교과서를 아버지에게 배웠기에 일본어가 능숙했다. 그래서 강사였던 오와다 요코(58. 당시 일본 및 미국에서 유명한 플루티스트)선생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고 그녀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아 일본, 미국의 연주자들을 소개받았고 우메즈 마사요시씨를 통해 요미우리 니폰 필하모니의 수석연주자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일본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연주단체의 연주자들과의 친분은 프랑스와 중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신뢰를 우선시 생각하는 일본 연주자들과의 관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한 번 입 밖으로 낸 말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냈고 그런 그의 하루하루를 지켜보던 이들이 이제야 조금씩 그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2003년 광주국제친선음악회, 한일교류음악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 일본에서 작은 음악회를 기획하다가 2006년 도쿄에서 열린 요미우리 니폰 필하모니의 ‘갈라콘서트’를 기획, 일본 음악계과 언론계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이런 경험이 계기가 돼 클래식 공연 기획자로서의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도쿄 프라임 심포니 오케스트라 예술 총감독

특히 2007년부터는 도쿄 프라임심포니오케스트라의 예술 총감독으로 활동하며 일본 내 기획자로서의 위치도 확고히 하고 있다. 일본 플루티스트 우메즈 마사요시(당시 요미우리 니폰 필하모니 플루트 수석) 선생의 추천을 받았지만 경력은 물론, 예술감독으로서의 자질과 인맥, 발전방향까지 세심한 테스트를 거쳤다. 임용된 후 적응하기도 힘들었다. 처음에는 음악회를 열기 위해 같은 상황을 10여회 이상씩 확인하는 그들의 방식에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그만큼 무대에서 실수가 줄어든다는 것을 알기에 스스로 그 방식을 선호한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2009년 내 고향 광주에 제대로 된 클래식 공연 문화를 만드는 첫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타도시보다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광주에 다양한 문화적 경험에 노출시키면서 변화의 바람을 만들고 싶었다. 충분히 발전가능성이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광주는 5.18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역사적으로 상징적인 도시이면서 음악제를 열고 있는 여타 도시에 비해 접근성이 용이해요. 이런 점들은 광주국제음악제의 차별화된 색깔을 가질 수 있지요.”

1회 때는 서울과 광주 공연을 펼쳤지만 올해는 광주공연만 진행한다. 경기침체로 인한 예산부족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절대 아니다. 지난해 서울 공연을 찾은 이들의 발길을 광주로 돌리기 위해서이다. 처음부터 만족할 만한 많은 이들이 광주까지 찾아 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년관람객들이 좋은 프로그램과 참여자들의 음악적 수준을 인정했기에 한 번 시도해 볼만 하다는 생각이다.

내년에는 클래식 시장의 강자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겨냥할 계획이다. 남도의 맛깔스런 먹을거리와 문화체험 등을 음악제와 연결시켜 관광 상품화 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는 전문적인 클래식 기획자가 되기 위해 그는 전남대학교 법학과에 편입해 공연기획과 관련된 법률을 익힌 후 추계예술대학교에서 문화예술행정경영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를 마쳤다. 주먹구구적인 기획으로 만들어진 공연이 아닌 1년 전부터 세심하게 계획하고 싶은 바람을 위해서이다.

지역민들에게 수준 높은 음악가나 단체들과 교류하면서 광주국제음악제를 독일의 잘츠부르그 음악제처럼 국제적인 규모로 키우고 싶은 그의 마음에는 음악에의 열정이 가득하다. 그의 열정은 꿈을 꾸게 했고 지금은 꿈을 이루기 위한 첫 계단에 서 있다.

백 씨는 서두르지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 쉬지 않고 꿈을 향해 갈 것이다.
언젠가는 서울, 중국, 일본 관람객들이 광주국제음악제를 손꼽아 기다리며 티켓을 예약하고 들으러 오는 그 날이 올 것이기에... 오와다 요코 선생의 가르침처럼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은 넓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