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는 한국미술의 뿌리 …민화 속에서 해답을 찾아야”
파인 송규태 선생 문하에서 30년 화업…부산 민화의 産母
토·일요일에만 한약국 문 열고 나머지 5일은 ‘민화와 함께’

뭐라고 글문을 열어야 할까? 원로 민화작가 김재춘 선생을 만나고 나서 쓰는 글이지만 좀처럼 글문이 열리지 않는다. 연예인에게는 만능 엔터테이너, 스포츠맨들에게 올코트플레이어 정도로 표현할 수 있지만 김재춘 선생의 경우는 꽤 많은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우선 대학에서 산업미술을 전공했고 이후 약학을 전공해 약사로, 의과대학에서 예방의학을 전공한 의학박사, 불교미술학 석사, 문화재학과 박사과정 수료 등 진정한 ‘평생학습 실천자’라고나 해야 할 것 같다.

약사·한약사·의학박사·불교미술·문화재학까지

김재춘 선생이 전국순회전을 앞두고 광주 전시장인 은암미술관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미술관에 들렀을 때 아름다운 피아노선율이 들렸다. 등 너머로 앉아 있어 누군지 알지 못했으나 알고 보니 김재춘 선생이었다. 피아노뿐 아니라 가야금과 바이올린 등 악기도 일가견이라고 한다. 초·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공부도 1등, 그림도 1등, 음악도 1등이다 보니 무엇을 전공할 것인가를 걱정했단다.

그런데 동국제국대학 공예학과 출신으로 우리나라 공예의 태두였던 4촌 오빠 김재석이 방학 때마다 공주에 와서 도자기를 굽고 그림을 그리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오빠는 그림을 잘 그린다며 색연필이나 도화지를 사다 주곤 했고 커서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는 칭찬도 여러 번 했었다. 김재석은 공예가로서 중앙대 성신여대에서 강의하면서 초대 서울대 음대학장을 지냈던 이관옥의 남편이기도 하다.

애기호랑이

할아버지 때 공주에서 진사 벼슬을 한 명문가이자 부자였기에 아버지 형제들은 동경유학을 했을 정도다. 그러나 경성제일고보 출신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일찍 타계한 데다 6·25 때 4촌 오빠 3명이 월북하는 바람에 집안이 몰락하여 적잖은 고생을 해야 했다. 그래도 언니 오빠들은 좋은 대학을 다니면서 공부했지만 6남매 가운데 막내였던 김재춘 선생은 혼자서 공부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고향인 공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수도여자사범대학 (현 세종대학) 산업미술과 4년 장학생으로 공부했다. 그때 운보 김기창 화백을 만나 문인화나 한국화의 기본을 익혔다. 그러면서 한국미술의 뿌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민화라는 세계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그림을 마음껏 그리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공부를 시작해 숙명여대 약학과에 들어가 약사와 한약사 자격을 동시에 취득했다.

약국을 경영하면서 식품공학 박사인 부산여대 교수와 결혼해 부산에 살면서 약사로, 주부로, 교수의 아내로, 세 아이의 어머니로, 그리고 만학도로서의 삶을 한꺼번에 살았다. 약국을 경영하면서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민화집을 봐가며 민화에 심취했다. 급기야 한국민화의 최고 원로 파인(芭人) 송규태(宋圭台) 선생의 제자로 입문해 30년 가까이 스승으로 모시며 민화작가의 길을 걸었다. 지금이야 민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시만해도 민화공부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것도 부산에서 서울까지 비행기를 따고 오르내리며 공부를 했고 어쩔 때는 선생의 아들인 송창수 작가가 화본(?本)과 조언을 전해주기도 했다.

송규태 선생은 한국 민화의 ‘거대한 뿌리’ 이자 ‘살아있는 역사’로 평가를 받는다. 송규태 선생은 단절된 민화의 전통을 회복하고 이를 전승하는 현대민화의 선구자다, 궁중민화의 수리복원을 통해 민화 기법과 비결을 터득함으로써 전통민화가 현대민화로 이행하는 과정의 이론적 체계를 구축한 큰 어른이다. 역사적으로 가치가있는 명작은 기어이 자신만의 색감으로 재현해냈다.

운룡도

김재춘은 큰 스승을 만나 제대로 공부한 덕분에 일찍이 민화에 대한 근본을 모두 익히고 여기에 스스로 조형적 연구를 통해 전통에 기반한 창작민화로까지 발전해 갔다. 10여 차례의 대규모의 전람회를 비롯 대한민국미술대전, 한국전통 사임당 민화부채공모전 회장, 한국전통문화예술협회 회장, 대한민국미술대상전 민화분과위원장 등 민화관련 각종 단체의 회장이나 심사위원을 지내는 등 한국민화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에 민화분과를 창설한 것도 그가 해낸 일이고 민화불모지 부산에 민화의 새바람을 일으킨 부산 민화의 산모(産母)이기도 하다. 20여년 동안 부산대 민화아카데미 지도교수, 경주대 대학원 문화재학과 특임교수 등을 지내면서 우리의 그림 ‘민화’ 부흥을 위해 헌신했다.

3월 2일부터 21일까지 은암미술관서 순회전

2022년 검은 호랑의 해를 맞아 전국에서 갖는 순회전은 그의 11번째 개인전이다. 지난 1월 동덕갤러리와 부산광역시청 갤러리에서 작품전을 가졌고 3월 2일부터 21일까지 은암미술관에서 광주순회전을 갖는다. 이후 3월 23일부터는 창원 성산아트홀, 그리고 4월에는 세종시 B·O·K 아트홀에서. 그리고 5월에는 제주 만덕기념관을 끝으로 순회전을 마무리한다. 부산 아트메디칼 김재춘 민화미술관에서는 김재춘 작가의 작품이 상설전시되고 있다.

이번 전국순회전의 타이틀은 ‘거대한 뿌리, 그 맥을 잇다-김재춘 민화세계’이다. 호랑이 100마리전과 용100마리전, 그리고 궁중회화전을 망라한 그의 대표작들을 엄선한 이른바 ‘김재춘 민화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자리다. 여기서 말하는 100은 숫자가 아니라 ‘많다, 가득하다’라는 의미다.

가두매점

우선 김재춘의 민화는 그의 삶만큼이나 다양하다. 호랑이와 용, 동물화, 궁중회화, 인물화, 문자도, 커피로 그린 커피화, 불화, 초충도, 신선도에 이르기까지 민화가 수용할 수 있는 모든 장르를 그야말로 차곡차곡 그려냈다. 황토나 커피를 재료로 한 그림에도 도전했다. 독특한 개성이 담겨지면서 현대자동차가 진출한 전 세계로 김재춘 민화의 이미지가 배포되었다.

호랑이 100마리, 용 100마리

이들 가운데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호랑이와 용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호랑이와 용만 가지고 호랑이 100마리전과 용 100마리전을 가졌을 정도다. 특히 그가 노년의 여성으로서 엄청난 대작 순회전을 갖는다는 것은 장부(丈夫)의 기개가 아니면 어려을 것 같다.

우선 그의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전통에 기반을 두되 그 자신의 미의식과 미적 감각을 반영해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신항섭)”는 것이다. 원작에 대한 왜곡이 아니라 원작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전체적인 이미지는 달라지지 않지만 부분적인 자의적 해석을 통해 뭔가 새로운 세계로 나가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다.
김홍도의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를 재현한 그림도 소나무를 대나무로 대신하고 낮을 달밤으로, 그리고 호랑이에 금분을 입혀 황금 호랑이로 표현한 것 등은 김재춘 민화의 창의적 발상이다. 또 ‘백호도(白虎圖)’를 황금 백호도로 재설정한 작품도 순정의 노란 황금을 입혀 지금까지의 호랑이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그의 예술적 여정은 이른바 ‘수(守) 파(破) 리(離)’의 길을 걷고 있다. 처음에는 철저히 전통을 지키고, 전통을 부수고, 그리고 마음껏 자유를 구사하지만 결코 원래의 법첩에서 벗어나지 않는 세계, 그는 전통에서 이동하지만 다시 새로운 전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민화 속의 호랑이들을 섭렵했다.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까치와 사악(邪惡)한 것을 물리쳐주는 호랑이의 그림은 감상화라기 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한 장식화 내지, 생활화이다. 그래서 김재춘은 민화에 등장하는 호랑이의 모습에 자신의 미학적 감수성과 조형적 감각을 반영해 현대적 민화를 창조하고 있다. 특히 호랑이의 생태적 특성을 파악하고 생물학적 요소까지 더해 생동감 있는 이미지를 창조해 낸다.

그는 시대적인 상황이나 사회적인 정서에 따라 양식이나 형식이 변모하는 것처럼 거기에 담겨지는 내용도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의 호작도에 등장하는 까치는 서민으로, 호랑이는 권력자나 세도가로 환치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서 호랑이가 권력자를 상징한다고 하더라도 맹수의 모습이 아니라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로 재해석하는 등 조형적 특성을 살리며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데 진력하고 있다.

이른바 무정형성(無定形性)의 민화다. 어떤 정형화된 모습이 아니라 그때그때 모습을 달리하고 상징도 다르다. 자유분방하고 해학적이고 익살스런 호랑이, 마치 아이들과 소꿉놀이하는 호랑이의 모습을 담아낸다.
옛 민화 ‘만용도’ 같은 것은 글자 자체를 일만 번 반복하여 큰 용(龍)자를 형성하면 벽사의 역할을 한다거나, 용의 뿔이나 여의주에 개인적인 소망을 담은 글씨를 깨알같이 써넣기도 했으나 그의 그림에서는 이 같은 주술적 서사는 없다. 시대변화에 따른 회회관의 변화라고 해석된다.

이건희 컬렉션 작품도 전시

그가 즐겨 다루는 용은 동양문화권에서 천후를 다스리는 신령스런 동물로 임금을 상징했다. 2019년 ‘100마리 용그림전’에서도 다양한 용을 보여주었는데 호랑이 그림에 대적할만한 진용을 갖추고 있다. 이번 순회전에서는 대작의 용과 호랑이가 서로 상박(相搏)하는 모습이 연출되고 수준 높은 궁중회화까지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작 가운데는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되었던 작품도 1점 공개 된다.
“정말로 우리의 민화의 세계는 무궁무진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우리의 미술입니다. 한국미술의 해답도 민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민화 예찬론자인 김재춘 선생은 70대 후반에 이른 지금도 하루도 빠집 없이 민화와 함께 살아간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민화그리기와 민화강의, 그리고 민화 관련 회의에 참석하고 토·일요일은 한약사로서 약국문을 연다. 이틀 동안 약을 지어 전국으로 보내고 또다시 민화와 함께 새로운 일주일을 시작한다. “민화와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행복하다.”는 말 속에서 초인적 에너지가 느껴진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큰딸은 한의사, 둘째 아들은 내과 의사, 그리고 막내딸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요즘 뜨는 상담사업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예술의 길을 수·파·리라고 하셨던가요? 저는 오래전부터 민화도 새로운 진정한 리의 세계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전시회가 그런 길로 나가는 분기점이 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에도 창작민화에 대한 갈증이 있었지만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몸짓으로, 한국 민화의 새로운 세계를 구상해보겠다는 구상이다. 사실 이번에 선보이는 그림 가운데 ‘조선시대 민화 12곡 병풍’ ‘백호도’ 같은 그림은 낮을 달이 뜬 밤으로 시간을 바꾸거나 호랑이 묘사에서도 털을 강조함으로써 오리지널 백호도와 다르다. 이미 창작 민화의 세계로 큰 걸음을 뗐다고 할 수 있다.

김재춘 선생의 호는 혜원(蕙園)이다. 얼마나 민화가 좋았고 혜원 신윤복을 닮고 싶었으면 호마저 혜원이라 했을까? 이번 전시회 이후 새롭고 크게 변모할 김재춘의 민화세계가 사뭇 기대된다. 지형원<문화통 발행인>